설악산에 가려고 마음 먹었지만, 설악산 일정이 점점 다가올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특히 밤에 잠을 줄여서, 그러니까 밤 11시 30분에 출발해서 그 다음 달 새벽 3시 30분에 도착해서 설악산에 오른다고 하니, 과연 체력이 버틸 수 있을까하는 자신 없음이 불쑥 불쑥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포기해야겠다 생각하고 담당자 현호씨한테 전화를 해서, 아무래도 무리가 될 것 같아서 취소를 할까 한다고 말했다, 현호씨 왈, 너무 무리가 되면 일정을 좀 조율 할 수 있다고 해서, 체력의 한계가 오면 그때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자고 하고 출발을 하게 되었다.
금요일 밤, 11시 30분. 양재역 근처에서 일행들과 함께 기다리니 큰 버스가 왔다. 우리 말고도 설악산에 가려는 사람들이 한 차 그득했다. 이렇게 밤에 설악산에 가려고 버스를 타는 이들이 많구나 신기해하면서 타자마자 나는 잠에 골아 떨어졌다. 그 날은 10시까지 큰 행사가 있어 일을 늦게까지 하고 온 터였기 때문에 눈에 졸음이 그득했다. 한참 자고 있는데, 누가 깨워서 눈떠보니 벌써 도착해 있었다. 시각은 2시 30분! 앗. 3시 30분도 아니고! 그럼 예상보다 1시간이나 더 못자고 설악산에 올라가야 한다!!! 아이고, 잘 버틸 수 있을까?
버스에서 내리니 공기가 서늘하다. 한 여름에도 서늘한 새벽공기. 설악산이니 가능한 신선하고도 추운 공기 맛이다!
화장실 다녀오고 정신을 좀 차리고 나니, 오색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마라톤 복장을 한 것 같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설악산 대청봉으로 가는 문이 열리기를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마치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듯 한 대열정비자세! 대회의 전운이 감도는 듯한 이 기운은 뭐지? ㅎㅎ 대회 전에 몸을 푸는 것 같은 동작들과 결의에 찬 표정들!
“음... 나랑은 딴판이네...”
조금 기다리니 문이 열리고 그 결의에 찬 사람들이 우루루 앞다투어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 무리에 섞여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가파른 등반길의 연속이었다. 석란씨가 쓰라고 준 랜턴 덕에 앞에 길이 훤히 보이긴 했으나, 새벽녘이라 온 사방은 어둡다. 몸은 다소 덜 깨이고 잠을 많이 못 잔 상태라서 몸이 아주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올라갈 만은 했다. (벌써 일주일 되었다고 그 힘듦을 까먹은 듯! 올라갈 때는 이 올라감이 언제 멈출까 싶었을 듯도...) 속도는 내가 제일 느렸지만, 그래도 철퍼덕 주저 앉지 않고 가는 게 어디냐 하면서 올라가고 있었다. 가다가 중간 중간 쉬는 곳이 있어서 쉬다가 가다가 했다. 1/5지점에선가 쉬면서 하늘을 보게 되었다. 밤 하늘에 별들이 그득했다. 서울에선 볼 수 없는 별풍경이 장관이었다. 새벽에 오니 이런 풍경을 즐 길 수 있구나 싶었다. 새벽산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구나...
마냥 쉴 수만은 없고 계속해서 올라가고 올라갔다. 석란씨가 싸온 과일과 채소로 갈증을 달랬다. 중간 중간 물을 먹다보니, 어느 샌가 물도 떨어지는 시기가 왔다. 가다보니 설악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만날 수 있었다. 약수터는 아니지만, 물병에 물을 담았다. 뭐 마신다고 큰 이상이 있겠나.. 걷다보니 땀도 많이 나서 그 물에 얼굴도 씼었다. 서울에 있을 때 비염과 눈가려움이 피로하면 약간씩 도지곤 했는데, 설악산의 신선한 공기와 물로 씼으니 그 가려움도 싹 가심...
어느 정도 갔을까? 동이 트기 시작했다. 6시에서 7시 사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 배낭에 있던 여러 가지 음식을 꺼내어 먹었다. 갖고 있던 음식들이 꿀, 에너지바, 콩고기 말린 거, 견과류 등이었다. 그야말로 꿀맛!!!
그 쉼터는 유난히 다람쥐들이 보여다. 다람쥐들이 1-2마리 나타나서 호두를 주었더니 잘 먹었다. 그러다보니 여러 마리가 나타나서 더 달라는 듯이 우리 주의를 맴돌았다. 서울에서는 청솔모는 많이 봐도 다람쥐 구경하기 힘든데, 여기는 다람쥐가 넘쳐나네. 다람쥐에게 먹이 주고나서, 마지막 힘을 내어 대청봉으로 항하였다.
얼마전 부터인가 앞질러 가던 석란씨가 안보이기 시작했다. 날다람쥐 같이 슝슝 올라가서 벌써 어느정도 다다른 듯했다. 전화를 해보니 대청봉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그로부터 1시간 30분정도 더 갔을까? 드디어 정상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알프스에 도착하여 평지가 좌악 펼쳐지는 느낌이랄까? 알프스를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알프스에 오르면 대지가 좌악 펼쳐지는 느낌이 이런 느낌 일 것이라 상상했다. 나에게는 여기가 알프스다!!!
다 올라왔다는 안도감에 사진을 찍고 정상 표시가 있는 바위에 이르렀다. 날씨까지 청명해서 그 장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쪽빛 하늘과 설악산의 절경이 어우러져, 거기에 시원한 혹은 춥기까지한 청량한 바람이 그동안의 수고로움에 보답처럼 쓸어주고 있었다.
언제 정상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그 닥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겐 너무나 엄청난 여정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저 걷고 또 걷다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그래.. 인생이 이런 게 아닐까....
새벽 캄캄한 밤에 정상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걸릴지 막막했다. 내 체력의 한계는 여전해 보이는데, 막상 출발은 했고, 그저 올라야하기 때문에 걷고 또 걸었다. 오늘따라 배낭에 이래저래 쑤셔 놓은 짐이 많은지... 짐이라도 좀 가볍게 하고 올걸, 후회도 되었지만, 소용없다. 가져온 짐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체력은 속도를 낼 수 없는 상태이다. 욕심내려 놓고, 그저 가야하니 갈 수 밖에 없으니, 갔다. 가다보니 끝이 보였다.
끝에 다다르니 멋진 설악산의 풍경에 매료되어 감탄을 연발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내가 정상까지 완주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안도감, 환희와 기쁨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섞여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너무 기뻤다.
그리고,
막막한 어둠을 뚫고 걷고 또 걸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옆에 함께한 다오름 가족들 덕이다. 혼자서는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길을, 다오름과 함께 하니 도전할 수 있었다.
산, 인생 그리고 다오름....
나의 인생 2막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떠오르는 키워드 들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앞으로 걷고 또 걸어봐요.. 그 끝엔 또 무엇이 있을까요?
쉬엄쉬엄 가는 속도만큼이나 우리네 인생사도 결국 목적지에 누가 먼저 가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느냐가 중요한거 같습니다.